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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격포 소대장군사학교와 포병학교에서 강렬한 훈련을 마무리한 18~19세의 소위들은 1943년 붉은군대에 들어갔다. 전선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빨리 전투에 투입되고 싶어했다. 누군가가 첫 전투에서 많은 수가 죽을 것이라고 말해줬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고 믿지 않는다. 만약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버티고 서서 적진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며 전선에서 하루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중앙전선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는데 어디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봄이었고 화창했으며 부서진 역 외에는 전쟁 중이라고 생각돼지 않았다. 세르빈 중위는 트럭을 기다리는 동안 산책을 허가했다. 우리는 거리를 걸었고 행인은 별로 없었다. 검은 사제복을 입은 정교회 신부가 다가와서 ‘좋은날입니다. 장교동지들.’이라고 인사했다. 우리는 놀라서 인사에 답했다. 놀랍게 사제복에 붉은기 훈장이 달려있었다. 옆을 지나던 여성이 그 신부가 독일 점령기간에 파르티잔을 이끌고 싸웠다고 설명해줬다. 그는 지역 정교회에서 다시 봉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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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작성이 완료되고 우리는 마을을 떠나 스보보다(‘자유’라는 의미)라는 작은 마을로 갔다. 그때는 몰랐지만 중앙전선군 사령부가 있는 곳이었다. 세르빈 중위는 서류를 인계하고 행운을 빌어주고 떠났다. 30분 후 우리는 체르냐호프스키 중장의 제60군에 배속됐다. 지나가는 트럭을 타고 사령부에 도착하니 포병사령관이 우리를 맞았다. 짧은 면접 후에 나는 4명의 동료와 함께 제497박격포연대에 배속됐다. 박격포에 대해 교육 받지 못했다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스스로 결정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어리고 포병학교에서 배운 지식이면 박격포연대에서도 복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밤늦게 연대에 도착했다. 시체의 부패 악취와 멀리서 들리는 기관총 발사음으로 전선이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대 참모장이 우리를 맞았고 자신의 고향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툴라 지역의 마을에서 태어나서 그와 고향이 같았다. 그는 다른 장교들을 포대에 배치해 보내고 나만 남았을 때 정보참모직을 권유했다. 그건 책임이 막중한 임무였고 최소한 대위의 직책이었다. 나는 소위였고 18세였으며 군사학교를 갓 졸업했다. 경험도 없는 업무의 복잡성과 작전 중에 연대본부에서 큰 책임을 가지고 근무해야 하는 것에 기가 죽었다. 참모장은 ‘너무 걱정하지 말게. 다 잘 될거야, 자넨 포병사관학교 출신이 아닌가, 연대에는 아무런 전문 포병훈련을 받지 못하고 하사관에서 진급한 장교들이 대부분이라네.’ 하지만 나는 강하게 거부하고 소대장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알아서 하게, 자네에게 더 나은 직책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원한다면 연대에서 제일 우수한 제1대대 제1포대로 보내겠네.’ 그는 연락병을 불러서 나를 제1포대로 보내줬다. 제497박격포연대는 쿠르스크 돌출부 서쪽의 세임강 릴스크 맞은편에 있었다. 밤에 연락병은 정교한 교통호를 통과해 제1포대로 데려다 줬다. 나는 참호로 들어가서 포대장에게 신고했다. 출신지역 질문 등 상투적인 짧은 대화가 오간 후 포대장은 저녁식사를 가져오게 하고 알루미늄잔에 보드카를 따라서 환영건배를 했다. 술을 못 마신다고 하자 그는 전선에서는 누구나 술을 마시며 어린 시절은 잊어버리고 진짜 어른이 돼야 한다고 했다. 나는 보드카를 마시고 식사를 한 후 참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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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정오경에 연락병이 나를 깨웠고 포대장에게 보고하라고 했다. 포대장에게 가니 소대를 인계받으라고 했다. 나는 박격포를 실제로 본적이 없었고 포병학교에서 책으로 본 게 전부였다. 소대를 인수하기 전에 교범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포대장은 교범은 물론 관련 자료는 없고 관측계산표 뿐이라고 했다. 그는 관측계산표 만 있으면 소대의 사격을 지휘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사격법과 장비에 대해서는 지휘권을 인수 한 후 배우라고 했다. 아침 식사 후 포대장은 나를 사격 준비를 하고 있는 제3소대에게 안내했다. 소대의 병사들은 25~45세였고 경험 많고 전투에 단련돼있었다. 나는 모든 병사들의 이름을 확인한 후 해산시키고 포 지휘관들은 남으라고 명령했다. 나는 포 지휘관들에게 박격포를 보자고 명령했다. 박격포는 교범대로 170㎝ 깊이의 호에 잘 위장돼 있었다. 쿠르스크 돌출부의 지휘관들은 사격진지, 교통호, 참호를 완전히 감췄고 위장막은 항상 푸르게 유지했다. 내가 박격포에 대해 모른 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고 지휘관들은 나의 즉석 장비점검에 대해 완벽히 답했다. 박격포 부품들의 명칭은 생소했다. 나는 점검하고 들은 대답들을 상호 대조했고 정확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6번포의 핸들에 녹이 있다고 질책을 하고 나서 그들을 해산시키고 포대의 다른 장교들에게 나를 소개하기 위해 갔다. 하사관 출신인 제1, 2소대장 들은 실전을 통해 모든 것을 배웠다. 그들은 나를 환영했고 박격포 사격계산표를 공유해줬고 하사관들이 훈련 중에 나를 보좌할 것이라고 알려줬다. 120㎜ 연대박격포는 부드럽거나 딱딱한 바닥에서 모두 사격할 수 있었다. 딱딱한 바닥에서는 포신에 포탄을 넣으면 자동 발사됐고 부드러운 바닥에서는 줄을 당겨야했다. 포탄 무게는 15.9㎏이고 최대 사거리는 5.7㎞였다. 포탄은 지연신관을 사용할 수 있었다. 박격포대는 포병학교에서 배운 이론대로 일제사격이 가능했고 전차에 직접사격은 불가능했으므로 대전차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Fw 189 ‘창틀’ 그 지역은 조용했고 항공공격과 포격 만 있었다. 독일군은 야간에 조명탄을 쏘고 기습포격을 했으므로 개활지에 나가지 못하고 참호를 이용해야 했다. 적은 낮에 탄착관측기를 고공에 띄웠다. 그것은 특이한 생김새로 라마(창틀)이라는 별명의 Fw 189 쌍발기였다. 대단히 격추시키기 어려운 걸로 봐서는 장갑동체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소대장 업무를 금방 배웠고 2주 후에는 야간에 위치를 옮겨가면서 실전사격을 실시했다. 이 전술은 적에게 사격 위치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독일놈들을 더욱 혼란시키기 위해 가짜 박격포를 사격한 자리에 세워놓기도 했다. 우리가 참호에 안전하게 있는 동안 독일 항공기와 포병은 가짜 박격포 진지 격파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이 속임수를 항상 이용했고 사격진지를 이동하는 것도 잘 먹혀들어갔다. 단 가짜 박격포가 독일군에게 파괴됐으므로 새로운 목재를 구하는 것이 어려웠다. 기습포격 동안 주진지에는 포탄이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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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창틀’이 쿠르스크 쪽에서 날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진지 옆에 보병이 있었는데 소총 사격을 시작했다. 창틀은 보병 전방진지와 포 관측진지 앞에 추락했다. 나는 장교들이 진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을 봤다. 그들은 누가 사격했냐고 물었고 우리는 그 보병을 지목했다. 장교들은 그를 축하하고 적기 격추에 따르는 붉은기 훈장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도 같은 방법으로 훈장을 받고 싶어서 바퀴에 올린 14.5㎜ 대전차총 6문으로 적기를 쏘았지만 하나도 격추하지 못했다. 무모한 돌격1943년 8월초의 밤은 덥고 조용했다. 독일놈들은 트럭에 실은 스피커를 동원해서 선전을 했다. 러시아 탈영병을 내세워서 ‘나는 쿠르스크에 살던 농부입니다. 나는 독일편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사유 토지를 줬습니다. 독일 측으로 오세요!’ 등이었다. 우리는 최전선에서 2㎞ 후방에 있었으므로 똑똑히 들었다. 선전을 듣는 동안 포대 관측진지에 있는 제제프 중위를 호출했다. 우리는 스피커는 없었고 축음기가 있었다. 나는 축음기를 통해서 우리 생각을 알리자고 했고 마지막에는 저주를 퍼부었다. 이후 긴 포격과 기관총 사격이 시작됐다. 8월 둘째 주에 대량의 포탄을 보급 받았고 새로운 보병부대가 도착했다. ZIS-3 76㎜포를 보유한 연대포병이 도착해서 우리 좌측에 포진했다. 긴 조용한 시기에 파악한 모든 목표물에 대해 사격준비를 명령받았다. 주진지가 먼저 사격했고 우리가 뒤를 따랐다. 모든 포대가 최일선 독일 진지와 세임강 건너의 후방을 사격했다. 독일군은 3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방어선을 강화했으므로 엄청난 포격과 폭격으로만 격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공격은 하지 못했다. 적 화기의 위치를 사격한 후 적 후방을 조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때 보병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박격포들은 빠른 사격으로 벌겋게 달아올랐고 치열한 사격에도 독일 방어선은 멀쩡했다. 보병은 강을 건너다 큰 피해를 입었고 많은 부상자들이 진지를 지나 후방으로 갔다. 그들은 세임강물이 붉어졌다고 했고 끔찍한 일은 저녁까지 계속됐다. 나는 지휘관의 행동에 대해 당황했다. 왜 그런 피해만 큰 돌격을 명령했을 까? 후에 이것이 적을 속이기 위한 양동공격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행군저녁에 예상치 못한 명령을 받았다. ‘사격 중지! 야간행군준비!’ 행군준비에 3시간 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거기 3개월간 있었다는 걸 고려한다면 준비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다. 박격포수들은 천정이 3중의 목재로 된 참호에 들어가 있었고 참호벽과 천정은 방수포가 덮여있었다. 침상에는 양호한 짚과 방수포가 깔려있었다. 탄피로 만든 등과 탁자도 있었다. 장교들의 참호도 비슷했지만 침상에 매트리스가 깔려있었다. 이 매트리스는 주임상사가 어디선가 가져왔다. 사격진지는 교범에 의해 구축됐다. 박격포 호는 포신과 같은 깊이였고 참호벽은 목재로 보강됐다. 참호와 사격진지는 교통호로 연결돼있었다. 가슴 깊이의 이 임시호들은 꼼꼼하게 그물망으로, 과수원에 있는 박격포수들의 대피호는 사과나무가지로 잘 위장됐다. 취사, 목욕 같은 시설들은 사격진지 뒤에 있었고 식량창고, 탄약고, 박격포와 군마 대피호 등이 있었다. 심지어 여군 위생병이 돌보고 있는 암소도 있었다. 우유는 제일 가까이 있는 아픈 병사에게 지급됐다. 이런 시설들을 남기고 행군에 나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3시간 내로 행군준비를 완료했다. 물론 부피 나가는 것들은 남기고 암소는 지역주민에게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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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어둠을 뚫고 행군했다. 오랫동안 수비 태세에서 다시 움직이게 된 것은 기분 좋았고 아침에 처음으로 휴식했다. 나는 대대본부로 소환돼 포대의 당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나는 공산당 예비당원이었다. 나를 추천한 포대 정치장교를 제외하고 위원회에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신청서와 약력을 듣고 질문을 시작했다. 첫 질문은 실전경험이 있느냐는 것이었고 없다고 답했다. 위원들은 놀라는 눈치였고 정치장교는 내 소대나 포대가 적에게 사격한 일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답했고 적의 응사가 있었냐는 질문에도 수긍했다. 그러자 왜 실전경험이 없다고 답했냐고 물었다. 나는 실전경험이라는 게 육박전이나 엄폐 없는 곳에서 적에게 직접 사격 한 것인 줄 알았다고 답했다. 위원들은 터지는 웃음을 감추며 나에 대한 소련연방 공산당원 자격 투표를 실시했다. 회의가 끝나고 부포대장은 내가 당원이 됐다고 축하해줬다. 돌아오는 중에 그는 포대장이 곧 다른 대대로 배속될 것이며 내가 후임이라고 알려줬다. 이 소식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사실이었고 포대장의 관계가 불편했으므로 기쁜 일이었다. 나는 18세의 소위였고 전선에 3개월간 근무경험 밖에 없었는데 경험많은 장교들을 제치고 포대장이 된 것이다.(공산당원 특혜?) 나는 포대의 전투력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고 보급, 행정임무도 맡았다. 이런 걱정을 부포대장에게 이야기 했고 그는 그런 임무들은 처리할 수 있다고 안심시켰다. 그날 뜨거운 8월의 태양 아래 어려운 행군을 했다. 군마들은 과적된 마차를 어렵게 끌었고 바퀴는 계속 모래에 빠졌다. 마부는 어려울 때마다 마차를 밀어서 지친 군마들을 최대한 도우려했다. 내 짐은 지도가방 뿐이었지만 모래를 걷느라 지쳐있었다. 마차를 타고 싶었지만 참고 포대원들과 함께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지대의 먼지와 더위 속을 걸었다. 우리는 셉스크 지역의 독일군을 공격하기 위해 집결지로 이동했다. 저녁에는 시원해졌고 길은 단단한 도로로 바뀌었다. 병사들과 군마는 야간의 휴식을 기대하면서 힘을 얻었다. 8월 16일 자정에 대대는 넓은 정원에 정지했다. 대대장은 거기에 사격진지를 지정하고 참호를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각 포의 지휘관들에게 사격진지를 지정해줬고 병사들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부상과 수술밤중에 나를 포대장에 임명한다는 명령이 도착했고 나는 관측진지에 전방관측소대와 포대의 협동사격에 필요한 수치를 계산하라고 명령했다. 관측진지는 아직 구축 중이었고 위치 간에 전화선이 깔리고 있었다. 나는 잠을 자기로 결정하고 바닥에 눕자마자 잠들었다. 주변에서 폭발에 의해 잠이 깼다. 누군가 다리를 막대기로 때리는 것 같은 통증이 왔고 자극적인 강한 피냄새가 났다. 본능적으로 가까운 참호로 뛰어들었다. 독일놈의 박격포가 밀집한 우리 병력을 사격했고 박격포탄은 낙하하기 때문에 수류탄과 달리 땅에 엎드리는 것이 도움돼지 않았다. 포대의 다섯명이 박격포탄에 부상을 입어서 치료를 받았고 제2소대장은 다른 부상자에 붕대를 감으면서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뛰려했지만 왼발이 더 이상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발을 만져보자 손에는 피가 물들었다. 부하들은 발이 퉁퉁 부어서 벗겨지지 않는 내 장화를 잘라냈고 바지 위에 붕대를 감아줬다. 걷지 못했으므로 다른 부상자들과 함께 마차에 실렸다. 소대장에게 포대를 지휘를 맡기고 부하들에게 이별을 고한 후 마부에게 야전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내가 제497박격포연대에서 마지막 순간이었다. 마차는 도로 구멍과 돌들을 피해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하지만 작은 움직임에도 왼쪽 다리의 통증은 심각했다. 그날 밤 의무대대에 도착해 파상풍 주사를 맞고 짚이 깔린 침상에 누워서 수술을 기다렸다. 수술실은 큰 방수 텐트에 있었고 카바이드등으로 환했다. 그들은 군복을 벗기고 바지를 잘라낸 후 차가운 수술대에 엎드리게 했다. 내 옆에는 비슷한 수술대에 다른 부상병이 있었다. 그는 온몸이 상처였고 피투성이였다. 조용한 것으로 봐서는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등에 수많은 파편을 맞고 어떻게 견뎠는지 알 수 없었다. 군의관은 이미 파편을 제거한 후였고 붕대를 감으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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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병들은 내 수술을 준비하면서 군의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사흘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밤낮으로 수술을 할 수 있을까? 곧 쓰러질 것 같아.’ 그런 말을 들은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군의관이 내 피부를 자르고 왼발에서 파편을 꺼내는 수술을 준비하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몇 종의 마취제를 맞았는데 주사 두 대를 맞은 이후부터는 고통이 사라졌지만 몇 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군의관이 와서 내 피부를 절개하기 시작했다. 살이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수술을 돕는 위생병은 상처에서 나온 피를 모두 씻어 내지 않아서 피가 흘러 나의 배 부분에 고였다. 군의관은 피부를 넓고 깊게 절개하고 모든 도구를 사용해서 파편을 꺼내려 했지만 실패했고 파편은 천과 흙과 함께 다리에 들어가서 반대편 피부의 2㎝ 아래 있었다. 반대쪽에서 파편을 꺼내는 건 쉬웠지만 군복 천조각과 잔해들이 상처에 남아서 감염을 유발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군의관은 올바르게 파편을 들어간 쪽에서 꺼내려고 판단했다. 그는 더 깊게 잘라냈고 마취가 약해지면서 심한 고통이 시작됐고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온힘을 기울였다. 군의관은 ‘걱정말게, 파편은 곧 꺼낼 수 있다네.’며 나를 위로했다. 그는 손 전체를 상처에 집어넣어서 파편을 꺼냈다. 그 파편을 내게 보여줬고 붕대에 감싸서 기념으로 간직하라고 했다. 그것은 2~3㎝로 날카롭고 무거웠다. 붕대를 감은 후 나는 다른 부상병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후송병원으로 보내졌다. 병원은 마을에 있는 목조건물들이었다. 그 중에 한 오두막에 들어가서 진짜 침대에 뉘어졌고 식사가 제공됐다. 밤을 새웠던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른 부상병이 도착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그 부상병과 점차 대화를 시작했고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내 부상에 대해 이야기 하자 그는 나를 알아보았다. 바로 나를 수술한 군의관(소령)이었다! 내가 떠난 후 그곳은 폭격을 받았다. 수술텐트는 직격탄을 받았고 많은 부상병과 위생병이 전사했다. 소령은 위에 심각한 파편상을 입었다. 그의 판단에 의하면 오래 생존하기 힘들었다. 나는 다 잘될 것이라며 위로했지만 그는 의사로서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날 저녁에 후송됐지만 그는 부상상태 때문에 이동 시킬 수 없었고 심지어는 침대에 뉘어 놓지도 않았다. 그곳을 떠나면서 소령에게 다시 감사하고 빠른 회복을 바란다고 했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내 행운을 빌고 자신의 생은 끝났다고 했다. 구급차에 탔을 때 위생병은 소령이 분명히 하루를 버티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2층 침대가 3열로 깔린 대형 막사에 도착했다. 막사가 크고 부상자들이 많았지만 조용하고 질서 있었다. 간호사들이 부상자를 돌봐줬고 손에 붕대를 감은 부상자들에게 담배를 말아줬다. (그 시절에 독일이나 소련에 필터담배가 흔하지 않았다.) 흡연은 허락됐지만 한꺼번에 피우지는 못하게 했으므로 막사의 공기는 맑았다. 나는 아래 침대에 누여진 후 백신주사를 맞고 다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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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트럭에 실려서 역으로 보내졌다. 정식 침대차에 실렸고 다시 잠들었다. 부상당한지 사흘 후였지만 전투와 행군 시 잠이 몹시 부족했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적이 역을 폭격하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연기를 볼 수 있었고 건너편 철로에는 부상자가 가득 찬 열차가 불타고 있었다. 위생병들이 부상병을 불타는 열차에서 꺼내서 근처 플랫폼에 누이고 있었다. 우리 열차는 그곳을 빠져나왔고 간호사와 위생병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부상자 이송 준비를 했고 우리가 정식 병원으로 가게 된다고 알려주었다. 열차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구급차로 옮겨졌다. 그곳은 쿠르스크였다. 구급차는 전선군 병원에 도착했다. 전쟁 전부터 정식 병원인 건물이었다. 침대로 가기 전에 붕대를 갈고 씻었고 깨끗한 환자복을 받았다. 나는 2층 침대 4개가 있는 장교 입원실로 옮겼다. 한 침대에는 중위가 부상당한 다리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다른 침대에는 소령이, 침대 하나는 비어있었다. 훌륭한 저녁을 먹고 이 멋진 침대에서 다시 잠들고 싶었다. 갑자기 도시의 대공포들이 포문을 열었고 먼 곳에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또 폭격이군, 매일 밤 이렇거든’ 간호사가 말했다. 걸을 수 있는 부상병들은 방공호로 대피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우리들은 그 자리에 있었고 공황에 빠지지 않으려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폭격이 끝나자 다시 조용해졌고 부상자들의 신음소리만 다시 들렸다. 다음날 수석의사가 관계자들과 함께 환자들을 점검했다. 담당의사가 부상내용과 현재 상태를 보고했다. 수석의사는 환자의 상태를 살펴보고 병원에 대해 어떤 불편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중위의 병상에 오래 머물면서 상처를 살펴보고 괴저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긴급 절단 수술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중위는 다리를 자를 수 없다고 소리치기 시작했고 다리가 없다면 사람 구실을 못한다고 했다. 의사가 없어도 자신의 다리는 괜찮으니 내버려두고 의사들은 모두 지옥으로 가라고 했다. 수석의사는 나와 소령에게 오고 다른 사람들은 방에서 나갔다. 나는 수술 후에 발을 90도로 하고 펴지 못해서 매우 힘들다고 했다. 목발을 짚을 때 불편했고 무척 아팠다. 수석의사는 아파도 매일 다리를 펴보도록 하면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의사들이 떠난 후 소령과 나는 그 중위에게 다리 절단 수술에 동의하라고 설득했다. 수석의사가 한말은 심각한 내용이며 다리가 없어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욕을 퍼부으면서 자신의 일이니 홀로 내버려두라고 했다. 그는 내가 누굴 훈계하기는 너무 어리다고 했다. 식사가 도착하자 그는 식사를 거부했고 자신을 먹이려는 자는 지옥에 간다고 했다. 쿠르스크는 다시 폭격을 받았고 폭탄이 주변에 떨어져서 건물은 흔들리고 떨렸다. 폭격 후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중위의 신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의 몸에는 흰 천이 덮여 있었고 의료진들이 즉시 와서 들것에 싣고 나갔다. 수석의사가 경고한 사태는 예상보다 더 빨리 온 것이다. 옥수수비행기 다음날 수석의사가 왔다. 그는 내 다리상태를 걱정하고 죽은 중위처럼 될 수 있다고 했다. 무서운 괴저 초기 증세가 나타나고 있는데 치료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스크바에서는 치료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어린 나이에 다리를 잃고 싶지도 않고 중위처럼 죽기도 싫으니 모스크바로 보내 주면 감사하겠다고 했다. 수석의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부하 의사에게 나를 모스크바로 이송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30분 안에 구급차는 나를 비행장으로 데려갔다. 더글러스(소련이 DC-3을 면허 생산한 Li-2) 구급용 수송기가 이륙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텐트로 데려가고 구급차는 떠났다. 텐트에는 부상 장교 세 명이 있었다. 막 이륙한 더글러스는 꽉 차서 그들을 데려가지 못했다. 비행장 지휘관이 도착해서 큰 소리로 어떻게 도와줄지 물었다. 우리는 중상자들로 모스크바로 즉시 가야한다고 답했다. 그는 ‘잘 알고 있다. 경상이라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야’라고 했다. U-2 2기가 있는데 전선군 사령관 로코소프스키 상장의 직할이라고 했다. 그는 전선군 사령부로 갔고 15분 만에 사용허가를 받아왔다. 우리는 그 항공기에 즉시 실렸고 추가로 도착한 부상자까지 조종사 뒤에 2명은 앉고 한명은 짐칸에 누워서 태웠다. 내 앞에는 부상한 대위가 마주보고 앉았고 남은 공간이 없었다. 위생병들은 안전벨트를 해주고 행운을 빌고 문을 닫았다. 엔진이 돌아가고 항공기는 쉽게 이륙해서 점차 상승했다. 마을, 숲, 들판, 사람과 가축 하나까지 아주 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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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탄 항공기는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었다. 엔진은 트랙터처럼 돌아갔고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기체는 계속 고도를 변경했고 높게 날다가 난기류에 빠지기도 해서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내 앞에 앉는 대위는 창백해져서 토할 것 같았고 나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한시간 정도 있다가 기체는 하강해서 과수원 한가운데 넓은 평원에 부드럽게 착륙했다. 상쾌한 사과나무 향기가 나고 갑작스런 정적이 반가웠다. 조종사는 큰 사과 주머니를 등에 지고 곧 돌아와 부상자 발치에 실었다. 협동농장의 농부들이 와서 우리에게도 사과가 가득 든 주머니를 줬다. 조종사들은 여러 가지 훈장을 달고 있었다. 1943년 당시에는 많은 훈장을 받은 장교가 드물었다. 나는 그걸 어디서 받았는지 물었다. 그들은 전투에서 받았다고 했고 베를린이나 어디를 폭격했는지 묻자 여러 전투를 경험했으며 이번 수송도 전투에 포함된다고 답했다. 전선을 따라 날고 있으므로 언제 메서슈미트가 나타날지 모른다고 했다. 독일 전투기 공격 가능성을 듣자 섬뜩 해졌다. 조종사들은 몇 번이나 전투기 공격을 받았었지만 U-2가 조종성이 훌륭하고 초저공비행이 가능해서 살아남았다고 했다. 좁은 옥수수밭 한가운데 착륙이 가능했으므로 별명이 ‘옥수수비행기’였다. 그들은 우리 상태를 확인하고는 시동을 걸고 다시 이륙했다. 기체는 상공을 한 바퀴 돌았고 협동농장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비행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상처에서 피가 흘러서 완전히 녹초가 됐다. 6시간이 걸려서 저녁에 모스크바강을 볼 수 있었다. 조종사는 엔진을 끄고 투시노비행장에 부드럽게 착륙했다. 거대한 병원 텐트가 여기저기 있었다. 간호사는 우리가 옥수수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랐다. 아슬아슬하게 더글러스 수송기를 놓쳐서 그랬노라고 답했더니 ‘아 독일군에게 격추된 그 수송기?’ 라면서 그날 더글러스가 도착한 적이 없다고 했다. 저녁 늦게 우리는 큰 병원에 도착했고 가져온 사과들 간호사들과 부상병들에게 나눠줬다. 간호사는 처음에 받기를 거부했지만 그런 사과는 모스크바에서 25루블이나 했고 마침내 받았다. 나는 3개만 남기고 모두 나눠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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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가 끝나고 담당의사는 괴저가 일어나지 않았다며 확실한 치료를 위해 부상부위를 작게 절개하고 주사를 놓았다. 나는 병원에 오래 머물지 않고 모스크바의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빠른 치료를 위한 최신 장비를 갖춘 곳이었다. 옆에는 거대한 항공기 공장이 있었고 창문을 통해 소음이 들렸다. 창문을 통해 키에프 해방을 축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총사령관의 명령으로 제497박격포연대는 키에프 연대가 됐다. 회복병원병동 옆에는 소파와 탁자가 있는 방이 있었는데 전선에서 온 병사들에게는 지상천국 같았다. 수석의사부터 간호보조원까지 병원의 의료진들은 우리에게 최선을 다했고 매우 친절했다. 나는 젊은 간호사에게 추파를 던졌고 나이 많은 부상병 장교들은 우리 관계를 도우려했다. 부상은 점차 회복됐고 이미 목발 없이 걷고 있었다. 의사들은 나를 회복병원으로 옳기는 것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나는 11월 중순에 소콜니츠스키공원의 알렉신요양소로 보내졌다. 그곳은 장교들의 회복병원이었다. 내가 있던 곳은 요양소의 강당이었다. 거기 침대를 놓고 60명 넘게 수용했다. 아침에 병원은 규정을 어긴 장교들에게 명령을 읽어줬다. 허가 없이 모스크바로 갔다가 헌병에게 체포된 것이다. 그 명령에는 규정을 어길 때 며칠간 구금과 원 소속부대에 가서 근무하는 것 같은 벌칙도 있었다. 전선병사들에게 원 소속부대에 가는 건 당연한 것이었지만 구금 중에 월급이 50% 만 지급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우리는 군복은 없고 환자복과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요양원 울타리가 처진 운동장에서만 돌아다닐 수 있었고 날씨가 좋으면 공원에서 산책하는 것도 허락됐다. 나는 원시여서 세르게이 초린에게 시력검사를 대신 받게 한일이 있었다. 안경이 필요해서 의사에게 말했더니 모스크바의 군병원 안과로 보내줬다. 나는 필요한 서류와 군복을 받았다. 병원에 가기 전에 시간이 있었으므로 여자친구 간호사를 불러냈다. 그녀는 수간호사에게 외출허가를 받았고 우리는 붉은광장 근처에서 영화를 보는 등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학생이었으며 나와 동갑인 18세였다. 우리는 젊었고 전쟁 중임에도 아름다운 미래를 꿈꿨다.​1943년 모스크바는 매우 경직된 곳이었다. 독일 폭격기를 기만하기 위해 광장바닥을 가짜로 천정처럼 칠을 해서 인지 붉은광장은 작아보였다. 크레믈린 벽에는 가짜 빌딩 그림자까지 칠해져있었다. 하지만 레닌그라드에는 모스크바와 같은 지하시설이 없었고 경직된 거리와 달리 모스크바의 지하철역은 화려한 궁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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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군병원의 안과의사에게 가서 안경을 주문했다. 하지만 바그라티온 작전 시에 지도가방에 넣었다가 독일군 포탄에 산산조각이 돼서 오래 쓰지 못했다. 다른 장교들은 내가 군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그걸 오래 가지고 있다가 자신이 시내에 몰래 빠져나갈 때 빌려달라고 했다. 6일 후 어쩔 수 없이 반납할 때 까지 여러 사람이 군복을 사용했다. 후에 나도 임시로 군복을 받은 다른 장교들에게 빌려 입기도 했다. 후에 다른 사람의 군복을 입고 나갔다가 지하철역에서 헌병에게 잡혔다. 아무런 증빙서가 없었으므로 연행됐고 지휘관은 회복중인 장교들이 하는 행동을 잘 알고 있어서 ‘알렉신에서 온 예술가들’이라고 비꼬았다. 짧은 심문이 끝나고 구금된 장교들은 사무실 복도에 정렬했다. 다른 장교들은 군복규정을 어기고, 거리에서 상급장교에게 경례하지 않고 등 사소한 규정을 위반했다. 사령관은 두 시간 동안 제식훈련 후 모두 석방하겠다고 했다. 나는 처벌없이 석방됐고 다른 장교들은 덤으로 요양원에서 사흘간 가택 구금됐다. 1943년 11월말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됐다. 나는 나로포민스크의 포병연대 예비장교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5일 내로 신고하면 됐으므로 시간 여유가 있었고 병원에서 나오면서 여행 시 먹을 건조식품을 받았다. 고향 레닌그라드는 포위돼있었으므로 갈 곳이 없어서 그날 나로포민스크로 갔고 연대에 신고했다. 나는 100명이 들어가는 포병대대의 거대한 막사로 보내졌다. 거기는 개인용 침대가 없고 장교 2명이 침대 하나를 썼으므로 창문 앞에서 밤을 보내야했다. 창문에서 바람이 들이쳤고 얼음처럼 추웠다. 대대 장교들은 일반 병사들이 해야 하는 경비근무, 당직, 바닥청소를 했다. 그들은 내게 바닥청소를 하라고 했는데 나는 아직 5일간 떠나 있는 신분이라고 밝히고 열외 될 수 있었다. 그날 아침을 먹지 못했고 점심은 너무 늦게 도착했다. 내 서류가 처리돼지 않아서 식사는 어차피 배급돼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건조식품을 먹고 마을에 가서 친절한 여군부대에서 식사를 얻어먹었다. 연대에는 여러 유형의 장교가 있었다. 나처럼 부상에서 회복돼서 전선 복귀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될 수 있는 한 전선으로 가지 않으려는 자도 있었다. 거기서 같은 포병학교를 졸업한 장교를 만났다. 그는 1942년에 졸업하고 예비연대로 와서 아직도 전선 경험이 없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예비연대의 불편함(식량 좋지 않은 등)이 전선의 위험함 보다 나았다. 그런 사람들은 화장실 청소하면서 살아남는 것이 전투에서 포대를 이끌다가 죽거나 부상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선병사들은 연대에 오래 있으려 하지 않았고 빨리 보내달라고 자원했다.(각 연대에서 장교를 보충하러 올 때는 전선 경험있는 장교를 선호했다.) 나는 대대장에게 즉시 전선으로 보내달라고 청원했다. 그는 가능하면 곧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문 앞은 춥고 딱딱하고 외풍이 심해서 부드러운 병원침대와 극과 극이었다. 코고는 소리에 괴로워하면 서 뒤척이다가 얕은 잠이 들었는데 여자친구와 모스크바에서 이틀간 데이트를 즐기고 전선으로 가는 꿈을 꾸었다. 코토프스키 기병들이여 안장을 얹어라!두 번째 날에도 예비연대에서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아침에 나로포민스크를 배회했고 점심때 연대에서 식사를 했다. 오후에는 빈 침대에서 잘 수 있었다. 저녁은 지루한 시간이었다. 모든 장교들이 돌아오자 침대가 없어서 다시 창가로 갔다. 한밤중에 당직장교가 깨웠고 대대본부 호출이라고 했다. 대대본부에는 나와 같이 호출된 장교가 일곱명있었다. 당직장교는 대대장이 우리 요청에 따라 전방전출을 허가했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제3근위기병군단으로 보내졌다. 그는 그런 유명하고 긍지 높은 부대에서 싸우는 것이 영예로운 일일 것이라고 했다. 포병학교에서 훈련받고 박격포 부대로 보내졌고 이제는 기병이라니!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질문 있나?’ 제3근위기병군단에서 온 중령이 장화에서 날카로운 박차소리를 내면서 물었다. 모두가 침묵했지만 나는 군단에 포병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군단에는 포병, 전차, 카츄샤로켓에 직할 항공기까지 있다고 답했다. 즉시 대기 중인 스투드베이커 트럭에 올랐다. 우리는 몇 시간 후 군단사령부에 도착해 포병사령관에게 신고했다. 나는 제5근위기병사단에 배속됐다. 사단 사령부에서 다시 제24근위기병연대로, 연대본부에서는 기병의 장점은 모두 가진 지적인 토드추크 대위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다정하게 웃으면서 연대 포병에는 공석이 없고 즉시 전투에 투입될 것이므로 다른 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실망했고 토드추크는 ‘실망하지 말게, 귀관은 명성 높은 붉은기 연대 소속이네. 게다가 사단은 근위 레닌 베사라비아 코토프스키 붉은기 기병사단일세. 잠시 후 귀관은 연대의 76㎜ 포대로 보내질 것이네. 후에 귀관을 도울 방법을 알아보지.’(서방과 달리 붉은군대의 부대명칭은 역사적 사실과 장소가 함께 들어가서 긴 경우가 많았다. 길면 길수록 뛰어난 부대였다. 제5근위기병사단의 1945년 정식 명칭은 제5근위 레닌 붉은기 제2급 수보로프 붉은기 베싸라비아 타넨베르크 코토프스키 기병사단이었다.) 그는 사단역사에 대해 간단히 알려줬다. 적백내전의 전설적 지휘관 코토프스키 휘하에서 기병여단으로 출발했고 제3기병사단으로 개편됐다. 대조국전쟁 발발 시부터 전투에 투입됐고 지연전과 독일군 후방 습격작전을 실시했다. 사단은 근위명칭을 받고 제5근위기병사단이 됐고 제158기병연대는 제24근위기병연대가 됐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됐다. 대부분의 장교와 병사들은 ‘스탈린그라드 방어’ 참전장을 받았다. 나의 새 부대의 역사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았지만 기병은 현대전에 어울리는 병과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다시 부상을 입으면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후에 생각이 점차 바뀌어서 부상 회복 후에도 원대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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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는 나를 포 전문가로 취급했다. 내 이력인 레닌그라드특별포병학교와 톰스크포병사관학교 졸업에 강한 인상을 받은 모양이었다. 대위는 연락병을 불러서 나를 연대포대 지휘관에게 안내 했다. 그는 악수를 하면서 행운을 빌어주고 박차소리를 내면서 사라졌다. 연대는 하루 휴식 중에 급히 행군을 준비했다. 기수들은 본부를 드나들었다. 보병과 달리 기병은 장화를 신었고 외투 뒤쪽은 안장에 오를 수 있도록 찢어져있었다. 견장의 테두리선은 기병 병과색인 하늘색이었고 편자와 겹쳐진 군도 표식이 붙어있었다. 기병은 소화기에 더해서 군도를 보유했다. 곧 연락병이 돌아와 포대 주임상사의 마차가 도착했다고 알려줬다. 그는 전쟁 전부터 기병이었고 크고 수다스러웠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어를 섞어서 쓰면서 내 신상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 그는 내가 도시출신이고 기병경험이 없다는 말을 듣고 기병은 전투의 동반자인 군마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했다. 장교나 사병의 중요한 임무는 말을 돌보는 것이라고 했다. 포대에 도착해서 예비장교의 신분으로 포대장에게 신고했다. 포대장은 25세로 젊었고 나를 소대장들에게 소개시켜줬다. 그들과는 공통점을 발견하면서 곧 친구가 됐다. 쿠츠마르 중위는 파이프담배를 물고 웃으면서 자신의 소대에서 지내라고 했고 나는 흔쾌히 응낙했다. 포대는 숲 가장자리에 있었고 야간행군을 준비하고 있었다. 포대의 무장은 1939년식 76㎜포였으며 6필의 군마가 견인했다. 보병사단에서는 이 포를 2필이 견인했으므로 기병중대의 행군속도에 맞추기 위한 편성이었다. 저녁에 날씨는 나빠지고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는 강하지 않았지만 계속 내렸다. 조리병이 도착해서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쿠치마르의 마부가 장교식사 2인분을 담아왔다. 그는 나무 밑에 방수포를 깔고 통을 놓은 후 빵과 수저(자신의 장화에서 꺼내)를 놓았다. 외투 사이로 스며드는 비속에서 우리는 왕성한 식욕으로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기 전 연대본부 쪽에서 나팔 소리가 들렸다. 쿠치마르가 ‘명령-안장을 올리고 승마하라’는 뜻이라고 알려줬다. 곧 어두워졌고 기수, 장교, 마부들은 조용히 군마에 안장을 올리고 마차와 포를 행군할 수 있게 준비했다. 명령은 몇 번 반복됐고 소리가 달랐다. ‘코토프스키 기병들이여, 안장을 얹어라’ 이 신호는 길고 힘든 행군의 개시를 의미했다. 포대는 도로로 접어들어 연대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어둠이 내리고 조용했지만 발굽 소리만이 군단의 존재를 알렸다. 비는 밤새 쉬지 않고 내렸다. 바퀴와 말발굽은 도로 표면을 진흙의 바다로 만들었다. 포차의 축은 굴러가지 못하고 진흙에 계속 빠졌다. 방수포를 입었지만 피부까지 젖었다. 새벽에 온도가 내려가면서 우박이 내려 방수포는 얼어붙고 외투는 얼음처럼 딱딱해졌다. 뼈 속 까지 얼어붙어서 행군은 더 어려워졌다. 병사와 말들은 휴식 명령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끔찍한 날씨에서 담배 피우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기다려온 나팔 신호가 들렸다. ‘지휘관, 집합’ 이 신호는 우리가 정지해서 군복을 말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대조국전쟁 시 붉은군대 기병이 사용한 신호 중 중요한 건 두 가지인데 ‘안장 얹어!’는 긴 선율로 안장을 얹고 군마를 기관총, 포, 탄약마차에 연결하라는 의미였다. 연대본부에서 신호를 보내면 연대 나팔수들이 반복해서 불었다. ‘지휘관 집합’은 보다 쾌활한 음률이었다. 행군을 중단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휴식지역 5㎞ 전방에서 불었다. 지휘관은 빠르게 대열 선두로 집합했다.​포대는 마을의 피해없는 건물 옆에서 하루를 쉬었다. 나는 임무가 없었으므로 쿠치마르는 집 한곳에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 나는 감사를 표하고 가까운 집에 들어갔다. 병사들이 빽빽하게 농가 바닥에 누워있었다. 따뜻했지만 누군가가 외투를 말리는 지 공기는 탁했다. 어린이 둘이 소련식 난로 위의 침대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친절한 집주인 여성은 옷을 벗어 난로에 말리고 그 동안 아이들 옆에 서 좀 자라고 했다. 나는 난로 옆에서 행복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